본문 바로가기

재미있는 조선시대 일상수집/조선시대 일상

조선시대 동전던지기로 결정된 수도 한양

오늘날 서울은 한국의 수도로, 엄청난 인구밀집과 여러 가지 첨단기술

편리한 편의시설들이 밀집된 도시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서울은 오히려 유령도시로 찬밥신세를 받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개성(개경)이 수도로써의 역활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수도로 서울(한양)을 정했을 때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실제로 한양천도를 했다가, 실패했던 일화들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서울(한양)이 수도가 되었을까요?

오늘은 서울(한양)이 수도가 될수 있었던 이유와 과정에 관해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명당

조선의 수도 한양의 찬밥신세

한양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각각 한번씩 수도가 되었다가 다시 개성으로 옮겨간 아픔이 있습니다.

1390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천도후 생긴 여러 가지 자연재해와 불길한 일들로 결국 개성으로 환도를 하게 됩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을 버리고 한양 천도를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료들은 삶의 터전이 개성이었기에, 두집살림을 해야 했고, 수도 이전에 불만이 점점 커갔습니다.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민심마저 잃어버리게 되자, 천도 문제는 다시금 공론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륜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무악으로의 천도를 요구했고, 무악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정종은 관료들을 불러 최적의 장소를 찾기 위해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개성으로 환도할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개성으로 가기 위해 거리로 나오자,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백성들을 타일러 집에 보냈다는 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양에 있기를 꺼려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수도이전 문제를 두고 아래의 3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을 이루게 됩니다.

1.개성을 도읍으로 유지하되 종묘와 사직은 한양에 두자는 의견
2. 무악을 새로운 도읍으로 하자는 의견
3. 이전처럼 개성을 도읍으로 하자는 의견

논쟁이 길어지자 태종은 한 가지 황당한 제안을 하게 됩니다.

 

 

 

동전던지기로 정해진 수도 한양

태종은 1404년 종묘 문밖에서 황당한 제안을 하게 됩니다.

바로 종묘에서 동전 던지기로 길흉을 점치는 '척전'의 결과에 따라 길 한쪽에 도읍을 정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종묘란?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

길흉을 점치는 데에는 엽전을 사용하였으며, 태종은 신하들과 함께 종묘에 예를 올렸습니다.

이후 묘당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엽전을 총 9번 던지게 됩니다.

그 결과는 한양이 2길 1흉, 송도와 무악은 각각 2흉 1길로 한양이 당첨되게 된 것입니다.

태종은 바로 한양 천도를 명하고, 다시는 천도와 관련된 어떠한 의견도 나오지 않도록 엄격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이렇게 동전 던지기로 수도를 정하게 된 이유는 어떤 게 있었을까요?

아마도 팽팽한 논쟁 속에서,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결과가 필요했을 것이고 어쩌면 조금은 황당하지만 누구도 결과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하늘에 맞기는 것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오늘은 동전 던지기로 정해진 수도 한양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시대 실제 벌어진 [친자확인 소송]과 [친자확인 검사]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서울 가정법원 맞은편 건물에는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 간판이 여럿 걸려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인터넷에 검색만 해봐도 친자검사를 해준다는 업체를 쉽게 찾을 수

minirecord.tistory.com

 

세종대왕과 그의 곤룡포를 입은 관리

안녕하세요. 미니쭌 입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야근에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 지독한 책벌레였던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 신숙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하루 종일

minirecord.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