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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조선시대 일상수집/조선시대 일상

조선시대는 16~60세까지 군복무를 한다고?(조선판 병역비리와 군역)

우리나라는 휴전상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는 20대때 국방의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비리를 저지르며, 병역의 의무에서 빠져나가려고 하기도 하죠.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병역의 의무를 빠져나가는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것 같습니다.

이번시간에는 조선시대 병역과 비리에 대해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영화/ 대립군

 

 

조선시대에는 16세에서 60세까지 군인신분

조선시대에는 16~60세의 남성은 대부분 병역의 의무를 지어야 했습니다.

이를 가리켜"양인개병제"라고 하는데, 양인은 양반,상인,농민을 가리키는 말로 예비관료인

유생들 관가와 양반가에 소속된 관,사노비를 제외하면 모두 군대에 가야만 했던거죠.

조선시대 군대는, 지금으로 치면 예비군과 비슷한 시스템으로 평소에는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자신의 순번이 되면 매년 2~6개월씩 군대에 복무해야 했습니다.

 

생업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게 2~6개월의 공백은 가족의 생계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돈이 없던 사람들은 야반도주를 하거나 인적이 드문 산골 또는 외딴 섬으로 들어가 숨어 살기도

하였습니다.

 

손장수라는 인물의 일화를 보면 이러한 고충이 잘 들어납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에 진압군으로 참여해 공을 세운 손장수는 천민에서 양인으로 오를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하지만 손장수는 다시 천미이 되게 해달라며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상소문을 올리게됩니다.

 

"저는 너무 가난하고 미약하여, 군역을 감당하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제발 성균관의 노비로 살게 해주십시오."

 

성종은 이 상소문을 보고 손장수를 성균관의 노비가 될수 있게 도와줍니다.

조선후기로 가면 양반들은 군역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더 많은 백성들이 군역의 의무를

떠안게 됩니다.

 

 

 

 

 

 

영화/ 대립군

 

조선의 군대와 면제조건

조선시대 군역은 정규군으로 입대를 하는 "번상"과 번상의 집 생계를 돕는 "봉족"으로 나뉩니다.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번상의 집에 식량과 옷감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대주거나 일을 대신 해주는것

이었지요.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일정 구역을 정해 군역에 동원되는 집과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집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복무를 하도록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정규군은 소속된 부대와 지역을 옮겨가며 복무를 하게 되는데, 정규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조선은 군장을 사비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특히나 기병으로 차출되면 그 부담은 배가 되었지요.

자신이 사는곳에서 군역하는 곳까지 말을 끌고와 관리를 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맹점을 틈타 이익을 취하려는 집단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들은 말을 빌려주거나 대신 근무해줄 사람을 

연결해주는 알선업체의 역할을 하며 막대한 부를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하면 군대에 면제를 받을수 있었을까요?

간단하게 정리를 해봤습니다.

1.60세 이상이면 면제

2.전사한 사람의 자손으로 조직되어 있는 궁중의 회위를 맡는 군대(충장위)에
들어간 사람은 3대까지 면제

3.불치병에 걸렸거나 불구인 부모를 봉양중이면 면제

4.부모가 70세 이상이면 아들중 한명이 부모가 90세 이상이면 모든 아들이 면제

5.아들이 사망한 경우 손자중 한명은 면제 

이외에도 현직 관리와 향리,성균관 향교 학생들은 제외, 정부가 발행하는 승려 신분증을 받은이는

면제 대상이었습니다.

 

 

 

 

 

 

영화/ 대립군

 

 

다양한 병역비리와 백성들의 고충

조선시대에도 참 다양한 방법으로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1.40~50대의 나이에 학생이 되려는 사람들

앞서 이야기 한것 처럼 성균관 향교의 학생들은 군역제외 대상이었습니다.

이런점을 이용하여, 40~50대의 나이에 병역을 피하려 학생으로 등록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1462년 세조는 이러한 폐단을 직시하고 나이가 마흔된 늙은 학생들은 충군(죄지은 자를 군대에

보내는 것)에 속하도록 명하게 됩니다.

 

 

2.군역보다는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

승려역시도 군역 면제 대상이었기에, 정부가 발행하는 승려 신분증인(승려도첩)을 받아 

군역을 면제 받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학생들 만큼 승려도 늘어났기에, 성종때에는 이러한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아내가 없는 중은 100명 중 한둘입니다.

나머지는 놀고 먹으면서 병역을 기피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상소에도 불구하고 도첩제는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며 하나의 군역 기피수단으로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영화/ 대립군

 

 

3.재력이 있다면 대립군을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편법들 대신, 사람을 사면 되었습니다.

일정 대가를 지불하고 군역을 대신해주는 대립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대립은 개인간의 거래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정치세력들과 결탁하여 중간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대립의 가격도 점점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초반에 한달에 포1필이던 비용이 15세기 말에는 8~9필, 16세기에는 60필까지 올랐다고 하네요.

 

 

 

4.가진자의 특혜

왕실 친족이나 공신들의 자손들은 그들을 위해 특별 편성된 부대가 만들어 집니다.

이들은 이름만 군인이지 훈련도 따로 없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런 폐단때문에 족보를 사서 왕족이나 공신의 자손으로 위장하여 군역을 면제 받으려는 시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5.양반은 군역에서 제외

앞서 말했듯 조선시대 초기에는 양반도 군역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서 양반들은 아예 병역의 의무에서 빠지게 되는데요.

여러가지 병역비리들이 점차 판을 치게 되더니, 결국 양반들은 더이상 병역비리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합벅적인 장치를 만들게 된것 이지요.

 

 

 

 

 

역사저널 그날

 

 

이런상황까지 오다보니 병역의 부담은 결국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임지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만도 한데,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과 윤휴와 같은

대신들이 양반을 다시 군대에 보내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정 비용

이라도 받아 국방비에 충당하도록 하자고 하였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군역의 문제가 결국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건 아닐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군역과 다양한 비리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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