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니쭌 입니다.
조선시대에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았던 여인들은 이혼을 당하면, 어떻게 살아가게 되었을까요?
이혼한 여인을 수치스럽게 보는 풍속 때문에, 아마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오늘은 조선시대에 이혼당한 여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공부해봤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직도 당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집에서 쫓겨나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주저앉기를 수십 번.....
더는 흘릴 눈물이 없을 때,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곳 서낭당에 홀로 서있는 제 삶이 두렵고, 무섭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당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합니다."
사극을 보다 보면 가끔, 족히 100년은 넘게 살아온듯한 큰 나무 옆에, 돌을 얹고 소원을 비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을 가리켜 우리는 "서낭당"혹은 성황당"이라고 합니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놓은 곳으로, 장승이 서있기도 하고, 오색찬란한 천들이 나무에 묶여 있어
기괴하거나 무섭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여성, 그 여성이 이혼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소박데기란 오명으로 따가운 눈초리를 받거나, 고향집에서 가문의 수치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차가운 현실에 내몰리게 되기 쉬웠죠.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나온 독특한 관습이 바로 [습첩]이라는 것입니다.
말뜻 그대로를 풀이해보자면 "첩을 줍다"는 뜻인데, 실제로 이혼한 여인들이 새벽 동이 틀 무렵 [서낭당]에
나가 있으면, 그녀를 가정 먼저 본 성인 남자가 여인을 거두어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 남자는 기혼이건 미혼이건, 양반이건 상관이 없었고,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를 꼭 따라가야만 했다고 합니다.
주로 노총각들이 배필을 데려가려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이 좋을 때면 어사나 낙향하는 관리, 혹은 지방 수령으로
발령 가는 벼슬아치를 만나, 팔자를 고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이른 새벽 쌀쌀한 바람에, 추위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고, 누구인지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서있는 한 여인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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