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마트 스토어와 유튜브의 인기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회사일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일 혹은 돈이 될만한 일을 하며, N 잡러 가 각광을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업으로 하다가 부업의 수입이 본업을 넘게 되면, 본업을 때려치우고 부업으로 전향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게 되었죠.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어떠했을까요? 조선시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밥벌이를 할수 없다는 불안감에 혹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다양한 종류의 부업들을 했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그중 최고 인기 부업이었던 짚신장사에 관해 알아볼까 합니다.
특히나 짚신을 팔아 엄청난 부를 얻었던 송세흥에 관해 자세히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똥 손도 돈을 벌 수 있었던 짚신 만들기
오늘날 신발은 발을 보호하는 것 이외에도,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아이템 중 하나가 되었죠.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손에서 태어난 짚신이 대표적인 인기 아이템이었습니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에서 벼의 줄기인 볏짚을 이용해 만드는 짚신은, 만들기도 쉽고 가격도 저렴했기 때문에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죠.
(물론 신분에 따라 짚신의 모양은 차이가 나기는 했습니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잘 알려진 토정 [이지함]선생이 포천에서 현감을 지낼 때,
먹고살 길이 막막한 백성들을 한집에 모아 놓고, 기술을 가르친적이 있었습니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가르치던 곧잘 배웠지만, 저 같은 똥손들은 사실 무엇을 하나 배우려고 하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죠.
이런 사람들을 위해 추천해주는 부업이 바로 짚신 만들기였습니다.
(조선시대 짚신 만들기는 짚신 삼기라고 불리웠습니다.)
땅이 없어 농사도 못 짓고, 밑천이 없어서 장사도 못하고, 특별한 기술도 가진 게 없다면
짚신삼기(만들기)가 제격이었던 거죠.
하루 열 켤레만 만들어도 먹고살기 충분했으며, 당시의 짚신은 내구성이 좋은 편도 아니었기에,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어도 서너 달 신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하니, 짚신의 수요는 엄청났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이렇듯 조선시대 가장 인기 있는 부업이 바로 짚신삼기였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도 농한기나 궂은 날씨에는 집에서 짚신을 만들었으며, 승려들도 가을과 겨울에는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렸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죠?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을 보면 승려에게 짚신을 선물로 받았다는 기록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전업 짚신장사들의 등장과 성공스토리
이런 수요에 발맞추어 본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비로운 노인 유 씨]
구한말 이건창의 기록에는 강화도에 살던 유 씨 노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기인? 장인? 같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 사람은 일평생 짚신만 만들며 살았습니다.
유노인은 무려 30년 동안이나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로지 짚신만을 삼았으며 짚신을 완성하면 집주인에게 전달해, 시장에 가서 쌀로 바꿔 오게 했다고 합니다.
이건창은 그의 집 맞은편에 살았지만 그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참 신비로운 노인이었던 것 같네요.
[짚신으로 자식 네 명을 키운 신운서]
흑산도에 신운서라는 사람은 짚신을 삼아 자식 네명을 키웠다고 합니다.
이 신운서라는 사람은 짚신 만들 재료를 짊어진 채,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짚신을 삼아줬으며
이렇게 자식 네 명을 키워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짚신은 노력대비 수익효율이 나쁘지 않았기에, 조선시대 최고의 부업으로 불렸던것 같습니다.
짚신 하나로 인생역전 송세흥
두 살 정도 된 아이가 서울 한복판에서 울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 아이는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서울에 올라온 경남 기장 사람이 이 아이에게 다가가, 울음을 달래줍니다.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아이를 대려다 키우기로 합니다.
이 남자의 성을 따라 아이는 송 씨가 되었고, 이름은 세흥, 이 사람이 바로 짚신 하나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송세흥입니다.
하지만 세흥의 집안은 생계가 넉넉지 못했던 탓에, 어린 시절부터 낮에는 품팔이 노릇을 하고
밤에는 짚신을삼으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너무 피곤한 날에는 잠을 쫓으려고 후추를 찧어 눈에 발라가며, 밤낮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절에서 더욱 열심히 짚신을 삼으며 꼬박 10년 동안
돈을 모은 후, 출가하여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10년 동안 모은 돈이 수천 냥이라고 하는데, 그 돈을 지금으로 환산하면 7000만 원 정도라고 하네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데, 이때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시 절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후, 아들과 함께 근처의 한 절로 향하게 됩니다.
이때 이웃 주민이 송세흥에게 절에 들어가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재산을 모으려면 속세 사람보다 승려가 낫지요."
송세흥은 다시 승려가 되어 열심히 짚신을 만들었고, 10년이 지난 후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자
비로소 절을 나오게 됩니다.
이때 그는 이미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쯤이면 짚신을 삼는 것을 그만둘 만도 하지만, 계속해서 짚신을 삼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는 항상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것으로 집안을 일으켰으니 잊을 수 없다."
전설이 된 짚신 장수 송세흥
그는 승려처럼 검소하게 살았지만,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눔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는 물이 맑아 청강이라 불리는 강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년 홍수가 나 떠내려가는 문제가 있었는데, 비용의 문제로 돌다리로 바꾸지 못해 매년 피해를
입고 있었죠.
이번에도 여름은 다가오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전전긍긍하던 이때 송세흥은 선뜻 나서
돌다리로 바꿀 비용을 지급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에 기념비를 세워 보답 하였고, 이 기념비는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청강교비]입니다.
송세흥은 98세까지 무병장수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손자는 무과에 급제하기도 하였죠.
사람들은 이를 축하하며, 베풀기 좋아한 덕이라며 그의 공덕을 칭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상여를 메줄, 일꾼들의 짚신, 수십 켤레를 만들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죽기 전까지 남들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네요.
이런 짚신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변함없이 사랑을 받았으나, 1920년대 짚신보다 비싸기는 하지만
내구성이 좋은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욱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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