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색직업 월천꾼
극한 아르바이트하면 여러분은 어떤 게 생각나시나요?
한 조사에 따르면 아르바이트생들이 꼽은 겨울철 가장 하기 힘든 극한 아르바이트로
"택배 상하차"를 꼽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찬바람을 맞아가며 외부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과 각종 사고에 대한 위험성,
명절 시즌에는 업무량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조선시대에도 택배상하차 못지않은 극한 아르바이트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색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신기한 직업이기도합니다.
오늘은 사람을 업고 시내를 건너야 했던, [월천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월천꾼의 탄생 배경]
조선시대에는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 덕분에, 강과 시내를 이용해 이동해야 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나루나 포구라면 뱃사공이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이동하면 되었지만 ,냇가나 여울은 두발로 직접 건너야 했죠.
여기서 조선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냇가나 여울을 건너려면 신발이 물에 젖게 되니, 신을 벗고 건너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양반 남성이나 여인들은 신을 벗는 것을 체면 상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에, 절대 밖에서 신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남자들에게 발을 보이는 것은, 여인이 곁을 허락한다는 뜻으로도 통했기에
가슴을 보이는 것보다 더 금기시되었죠.)
이런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해 생긴 아르바이트가 바로 [월천꾼] 혹은 [섭수꾼]이라 불리는 직업이었습니다.
평소 그냥 건널 수 있던 시내도 물이 불어나면, 위험 예방 차원에서 월천꾼을 썼다고 하니, 조선시대에
월천꾼은 꽤 흔한 직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물살이 세고, 차가운 강을, 그냥 건너는것도 아닌, 사람을 업고 건너야 했기 때문에
아무나 하지는 못했고 힘세고 기골이 장대한 마을의 장정들이 이 일을 주로 했다고 합니다.)
[극한 직업 월천꾼]
월천꾼을 아르바이트라고 이야기 한 이유는, 이들은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여름철 시냇물이 불어난 때 혹은 얼음이 단단하게 얼기 전과 녹기 시작하는 대목에 주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센 물살과 차가운 물을 이겨내야 했던 직업이니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고
늦은 밤 강가에 월천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었던 게, 숙종 때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러 간 윤두만과 월천꾼들이 함께 물살에 휩쓸려
빠져 죽은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이 었지만, 월천꾼은 한번 사람을 앉고 가는데 2~5전 정도의 돈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전은 보조적인 화폐단위로 10푼은 1전, 10전은 1냥으로 ,학자 황윤석(1729~1791)이 남긴 일기 [이재난고]의 기록에
따르면 머슴의 한 달 월급이 7냥 정도, 양반이 입는 고급 누비 솜옷이 4냥,평민이 입는 누비솜옷이 2냥에 거래되었습니다.)
월천꾼은 물이 새지 않도록 어깨까지 오는 가죽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차가운 얼음물에 오래 있을 수 없으니, 나름의 장비를 갖춰 일을 진행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월천꾼의 이야기]
"산 개울을 지나는데 월천꾼이 있어 가죽 바지를 입고 물속에 서서 삯을 받고 사람을 건네준다.
나를 업고 개울로 들어가다가 얼음이 미끄러워 발이 미끄러져
나를 업은 채 물에 주저앉아 버렸으니
비록 맹분의 용기와 제갈공명의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박사호 [심전고]-
박사호를 업은 월천꾼이 얼음에 미끄러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에 크게 놀란 박사호는 월천꾼의 목을 끌어안으며, 아등바등거리다가 물에 빠지게 됩니다.
그의 모습을 본 동료들은 배꼽 빠지게 웃었고, 박사호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다고 합니다.
비슷한 일화로 1868년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난 권숙도 월천꾼에게 업혀 불어난 시내를 건너다가
물이 목까지 차올라 옷이 다 젖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또한 영조와 정조는 제사에 쓸 물건을 옮기는데, 시내가 불어나자 월천꾼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정조 때에는 월천꾼을 쓰지 않고 물이 불어난 시내를 무리하게 건더다가 조정에 보고할 중요한 문서를
빠뜨려 잃어버린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지방관은 파직을 당하는 걸로 일은 마무리되었다고 하네요.
이처럼 변방의 급보가 자주 있는 시내의 인근에는, 백성들에게 월천꾼의 임무를 맡겨 항시 대기하게 하였는데
이런 임무는 너무나도 고역이었기에, 백성들은 스스로 비용을 내어 다리를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월천꾼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활용된 아르바이트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대부분 월천꾼과 고객들이 물에 빠지는 특별한 사건만 있습니다.
이유는 종을 부리는 이들은 종에게 업혀 강을 건넜고, 이런 일꾼을 쓰는 것이 워낙에 흔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이번 시간에는 조선시대 극한 알바이며 이색 아르바이트였던 월천꾼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백성들에게 강제로 노동을 시키자, 백성들이 이를 참지 못하고 직접 돈을 모아
다리를 놓은 웃픈 일이 일어나고 말았네요.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를 알고 계시거나, 궁금하신 내용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대신 공부해서 가져와 보겠습니다.
-참고자료:책 조선 잡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 이색직업에 관한 재미있는 영상이 있어서 가져와봤습니다.
조금더 다양한 조선시대 직업에 대해 알아보고 싶으시면 한번 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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