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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조선시대 일상수집/조선시대 일상

조선시대에도 당구장이 있었다?[옥돌실과 순종]

조선시대 당구장 옥돌실과 순종

 

조선시대에도 당구장이 있었다면 믿어지시나요?

이번 시간에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당구장 옥돌에 대해 공부해 봤습니다.

 

 

 

 

당구의 기원

당구의 기원과 전파

당구의 기원은 여러가지 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없습니다.

이런 당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추정됩니다.

당구는 당시 '옥돌'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한국에 머물던 월리엄 프랭클린 샌즈

호머 B 헐버트, 리하르트 분슈 등 외국인들의 회고록을 통해 , 서울 정동의 외국인 사교클럽에

서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서울뿐 아니라 전주 광주 등 지방도시에도 당구가 보급되어 클럽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주식회사 일승정 카탈로그에 실린 사진 조선황실의 당구장[옥돌실]

조선왕실의 당구장 [옥돌실]

왕실 관련 당구의 기록은 민간에서 유행하던 시기보다 조금 늦은, 1912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일신보 3월 1일 [이왕가 개설의 옥돌실] 사진과 [이왕 전하 옥돌]의 기사에 따르면

순종이 일본에서 옥돌대(당구대) 2대를 구입해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당구장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순종은 월,목요일을 옥돌 운동일로 정했는데, 이 정해진 날짜 이외에도 당구장에 자주 놀러 와서 

당구를 즐겼다고 하네요.

순종이 당구대를 주문했던 일승정의 영업안내 카탈로그에는 창덕궁 인정전 안의 당구장(옥돌실)의

모습이 실려있어, 어떤 형태로 꾸며지고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황실 당구장에 놓였던 당구 점수 계산기. / 나전백경도병풍 (국립고궁박물관)

당구대에는 대한제국의 상징 무늬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고, 당구대 뒤에는 매화도병풍과 나전백경도 병풍이

펼쳐져 있씁니다. 또한 두 병풍 사이에는 당구 큐대가 세워져 있고, 커튼 아래 원형 테이블에는 당구 계산기가

놓여 있는 등 요즈음의 당구장과 비슷한 형태로 꾸며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인정전 당구장은 현재 남아있지 않고, 대리석 당구대로 추정되는 일부분과 당구 계산기, 그리고 병풍등 만이

국립 고궁박물관 소장품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즐겼던 조선시대 당구[옥돌]

[매일신보]의 [이왕비 옥돌 소견 1914년 7월 4일] 기사를 보면 창덕궁 이왕비 전하, 즉 순종 계비

순정효황후가 매일 오전 10시 나인들을 대동해 인정전에서 옥돌로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또한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함께 당구를 치기도 했다고 하니, 황실에서 당구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황실의 당구장은 창덕궁뿐 아니라 퇴위한 순종의 아버지인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에도 마련되었습니다.

고종은 아침에는 11시까지 함녕전 침실에서 취침하고 새벽 2~3시깍지 침실에 들지 않은 채 덕홍전에 설비해놓은 

옥돌장에 나아가 공을 치곤 했다고 합니다.

또한 나인들을 데리고 공을 치게 했다는 기사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고종이 즐겨찼던 덕수궁 덕홍전 당구장은 사진이나 관련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고종과 순종 /고종황제 가족사진

 

순종의 당구실력은 어떠했을까?

순종은 외국인 당구 선수가 경성에 들르면 반드시 한 번씩은 만나봤을 정도로 당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점수를 내 득점에 따라 승패를 가르는 당구경기 였지만, 순종은 굳이 이기려는 욕심은 없이 항상 재미있게 치려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하는데, 순종의 점수는 대략 60~70점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현재 점수 체계와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어 순종의 당구 실력을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대략 150~200점 정도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종의 안타까운 일생

순종은 우리가 잘아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자녀 중 유일한 적자였습니다.

1898년 9월11일, 김홍륙의 사주를 받은 공홍식이 김종화를 시켜 고종과 순종에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습니다.

고종은 커피의 향이 이상함을 알고는 곧바로 그 커피를 땅에 부었으나, 순종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면서

이 부작용으로 이가 빠지고, 혈변을 누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순종은 운동을 하면 개선될까 해서 간간이 신하들을 데리고 큐대를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모든 권한을 잃고, 사실상 일본의 신하로서 창덕궁 이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나중에 순종과 고종에 관해서는 좀 더 자세히 공부해 보고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나라에 당구가 언제 들어왔으며 어떤 사람들이 즐겼는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최초의 황실 당구장 이면에는 국권침탈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다니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네요.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좀더 재미있는 조선시대 일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래에는 조선시대 당구장에 대해 설명한 유튜브 영상과 고종과 순종의 커피 독살살에 관한 영상이 있어

가져와 봤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신다면 좀더 좋은 공부가 될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당구장[옥돌]_유튜브영상

 

고종과 순종 독살 커피_유튜브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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